소비자, 작정하고 돈 쓰는 날 프롬 파티 /Cosmobiz 4월호 10-11쪽/

프롬을 앞둔 학생들은 예산에 맞춰 적던 크던 어쨌거나 돈을 쓰기로 작정한 소비자다. 뷰티 스토어를 찾는 일반 소비자에 비하면 조금의 노력으로도 판매에까지 닿을 수 있는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요즘 많은 뷰티 스토어에서 프롬의 매출이 예전만 못해 기대가 적다고들 하지만 졸업생들에게 프롬은 여전히 큰 의미를 갖는 행사이고, 그들은 멋진 프롬 스타일을 위해 기꺼이 지출할 의사를 갖고 있다. 결국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빼는 건 소비자가 아닌 우리의 역할이다. 이번 프롬 시즌엔 기대에 차있는 학생 소비자를 더욱 설레게 만드는 프롬 제품 진열로 프롬 충동구매를 일으켜 보자. 현재 뷰티 스토어에서 판매되는 뷰티 용품으로도 충분히 프롬 진열이 가능하다. 어떤 제품이 프롬을 준비하는 소비자의 지갑을 열 수 있는지 예상해보고 프롬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프롬 문화

12학년 졸업반 학생들의 대학 입학 허가서가 도착하고 나면, 홀가분해진 이들의 관심은 고등학교 시절의 마지막 행사인 프롬 파티로 넘어간다. 프롬 파티는 고등학교 졸업파티로 사회로 나간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실 과거에야 대학 진학률이 낮아 고등학교 졸업이 곧 사회 진출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요즘에 와서는 대학 진학률도 높아지고 프롬의 의미가 예전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힘들게 달려온 학생 시절을 마무리함과 동시에 성인이라는 새로운 시작을 앞둔 졸업생들에겐 프롬의 의미는 여전히 크다.

프롬은 주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참석을 제안하고 남녀가 한 쌍을 이루어 참석하는 로맨틱한 댄스파티로 근사한 옷을 차려입고 참석하는 고등학생의 무도회이다. 일반적으로 남학생은 턱시도를 여학생은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다. 특히 여학생들은 심하게는 몇 개월 전부터 드레스 준비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기대감이 큰 파티다. 이렇게 복장을 정식으로 차려입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프롬은 그냥 학생들 파티가 아닌 학교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이루어지는 큰 행사이다.

여기서 잠깐! 프롬 복장에 필요한 준비물

여자:

드레스, 헤어, 네일 아트, 화장, 액세서리, 구두, 부토니어(boutonniere) – 남자 옷에 꽂아주는 꽃, 프롬 코스 – 저녁 먹을 식당, 사진 찍을 곳, 댄스 끝나고 다 같이 모일 집

남자:

프롬 티켓, 턱시도, 구두, 저녁식사 값, 코사지(corsage) – 여자 손목에 달아주는 꽃

파티는 학교 강당이나 댄스홀을 빌려 이루어지는데 학생들은 심지어 리무진까지 빌려 타고 참석한다. 일부 극성 부모들은 고급 식당조차 마음에 차지 않아 유명한 장소를 임대하고 최고급 케이터링 서비스까지 제공하기도 한다.  프롬은 성인식과 같아서 성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자식을 위해 부모들이 아예 작정하고 돈을 써보겠다는 날 같아 보이기까지 한다. 옛날 졸업식날 이면 기다리던 짜장면과 갈비탕을 먹던 우리네 졸업과는 다른 모습이다. 요즘엔 이 프롬에 대한 지출이 커져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뷰티 스토어에서 판매할 프롬 코너 제품

앞에서 잠깐 나열한 프롬 준비물만 봐도 눈치챌 수 있듯이 프롬에 필요한 준비물의 대부분이 뷰티 스토어에서 판매하고 있는 제품들이다. 프롬에 필요한 뷰티 제품 중 학생들 예산에 맞는 저렴한 뷰티 제품을 모아 한 곳에 진열해 보자. 반대로 고급 레미헤어 제품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귀하게 키운 딸이 성인이 되는 날인만큼 최고급 헤어로 단장시켜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지갑을 열 것이니 말이다. 한국에는 수능이 끝나면 수능을 본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할인 혜택이 여럿 있는데, 스토어나 식당에서 매출에 도움이 된다고들 말한다. 프롬 이후까지 졸업생들을 축하해주는 이웃 가게의 마음으로 졸업생들을 위한 세일도 준비해 보면 어떨까?

네일 제품

몇 년 전부터 네일 아트는 프롬 코디에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학생들은 살롱에서 네일 아트를 받는 것을 선호하지만 수입이 마땅치 않은 학생들은 저렴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직접 손톱을 칠하고 간다. 프롬은 하루를 위한 이벤트라 고가의 젤 네일 제품보단 학생들 지갑 사정에 맞게 저렴한 네일 제품을 추천하는 것이 좋겠다. 일반 네일 제품이나 LED 램프가 없이 바를 수 있는 젤 네일 제품을 진열하도록 하자. 컬러군은 화려한 드레스에 맞춰 바를 것이기 때문에 화려한 색상이나 반짝이는 글리터 제품으로 진열하자. 또는 완성된 인조 네일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 제품도 추천해 볼 수 있겠다. Kiss 사에서 판매되는 아크릴 인조 네일 제품도 일회성 파티용으로 충분히 인기를 받을 제품으로 보인다.

헤어

번들헤어 패키지 딜을 만들어 추천해보자. IndiRemi와 같은 최고급 헤어에 각종 악세사리 제품을 보너스로 넣어 패키지 딜을 만드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최근 내추럴 헤어의 유행으로 내추럴 헤어를 한 학생들이 여럿 있지만 프롬 파티날 만큼은 드레스 스타일에 맞춰 헤어에 변화를 줄 것으로 예상한다. 재고가 많은 익스텐션 헤어를 프롬을 앞둔 학생들에게 저렴하게 처분해도 좋을 것 같다.

화장품

최근 속눈썹이 유행하기도 하지만 이전에도 드레스를 입는 날이면 절대 빠질 수 없는 화장이 속눈썹을 붙이는 화장이였다. 속눈썹 스타일은 자연스러운 스타일보다 이벤트성으로 붙일 화려하고 과감한 스타일이 인기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품 세트 메뉴 선물권을 만들어 권해보자. 졸업선물로 인기를 끌 수 있다.

제모

드레스의 형태에 따라 제모를 필요로 하는 드레스가 많다. 제모의 방법과 종류가 많지만 학생들 예산에 맞게 저렴한 레이저나 테이프 제품을 프롬 코너에 진열하자.

주얼리

뷰티 스토어를 찾는 흑인 손님들은 일반적으로 골드 톤의 주얼리 제품을 선호한다. 하지만 프롬 날 만큼은 드레스에 맞춰 화려한 큐빅 지르코니아나 비즈로 장식된 주얼리로 구매할 것으로 예상한다. <유지원 기자>

흑인 역사의 달

Freedom is Never Given; It is Won.

[2017년2월호, 76페이지] 2월을 의미하는 February는 정화(淨化)를 의미하는 라틴어 “februum”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인들이 매년 2월 15일 치르는 일종의 정화의식의 이름이 “Februa”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곧 2월의 이름이 되었다. 미국에게도 2월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비인간적이었던 시기, 흑인 노예제라는 아픔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화하는 ‘흑인 역사의 달’도 2월에 있기 때문이다.

‘흑인 역사의 달’은 저명한 역사 학자인 카더 G. 우드슨이 1926년에 제정한 ‘흑인 역사 주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시카고대학에서 석사, 하버드에서 박사 공부를 하던 우드슨은 미국 역사 속에서 흑인의 존재가 얼마나 소외되어 있고 조명되지 못하는 지에 대한 한탄을 느끼게 된다. 1915년 그는 Jesse E. Moorland와 함께 현재 ASALH(Association for the Study of African American Life and History)의 전신인 Association for the Study of Negro Life and History를 설립했다. 그는 “만약 어떤 민족에게 역사가 부재하다면, 가치 있는 전통이 없다면, 그 민족은 세계사 속에서 무시당하게 될 것이며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26년 우드슨과 ASALH는 2월의 둘째 주를 “Negro History Week”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2월 12일)과 노예방 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러스(2월 14일)가 그 주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원래는 1주일이었던 흑인 역사 주간이 미국 건국 이백주년을 맞았던 1976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1개월로 확대 선포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해마다 2월이 되면  ‘흑인 역사의 달’을 맞아 노예제, 편견, 빈곤 같은 패악에 맞서 수백만 미국 시민이 쟁취해낸 위대한 승리와 더불어 흑인들이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기여한 업적을 기린다. 또한, 흑인들이 당면한 여러 가지 이슈를 공론화하여 발전적인 비전을 모색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ASALH에서 선정한 올해의 흑인 역사 주제는 ‘흑인 교육의 위기(The Crisis in Black Education)’이다. 우드슨은 일찍이 “만약 우리 흑인들도 다른 인종들처럼 우리의 훌륭한 성과를 잘 가르친다면, 우리 아이들도 인종에 관계없이 평등과 정의를 열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믿었다. 물론 흑인들에게 부과되었던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의 한계 및 평등한 교육 기회의 제한을 간과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있었던 시대에는 읽고 쓰는 것을 배우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고 또 자유를 찾은 이후에도 한참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 대신 먼 거리를 걸어 흑인학교로 다녀야 했다. 법적으로 혹은 정책적으로 아니면 정치적으로 이렇게 분리된 교육 시스템은 19세기 후반부터 최근까지도 실제로 존재했다.

흑인들이 겪어 온 이 교육적 위기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재정적인 이유로 인한 교사의 부족, 학급 당 학생수 증가 및 인종 간 학업 성취도 차이와 같이 또 다른 형태의 위기가 팽배하다. 교육이 주는 혜택을 많은 흑인 학생들은 받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학교가 흑인 청소년들에게는 감옥의 쇠창살인 것은 아닌지.

하지만 흑인들이 걸어온 역사가 무수히 많은 위기들에 맞서 싸운 역사이듯이 후세의 교육에 대한 흑인들의 열망 또한 많은 노력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은 옆에서 훔쳐보며 배웠고, 그들만의 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투쟁했으며, 배움의 열망을 고취시키기 위한 아카데미와 멘토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흑인 교육의 위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심하는 것은 미국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민족이 걸어온 과거 역사를 기억하고 연구하고 나누는 일은 값진 일이다. 비록 그 기억이 때로는 수치스럽고 아프고 절망적이라 떠올리기 힘들더라도 우리는 계속 그 이야기를 떠올려야 한다. 좋고 나빴던 시간의 모든 기억들이 역사가 되어 전해져야 한다. 과거의 실수와 잘못, 그리고 그 어려움을 극복한 용기와 노력들을 기억하고 되돌아보면서 보다 더 희망적이고 건설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흑인들은 2월을 흑인 역사의 달로 삼아 그들의 역사문화유산을 기념하면서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현재를 살아나가고 있는 소수 민족인 한국인의 목소리와 이야기도 되살리고 알리고 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흑인 역사의 달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제품을 팔아주는 소비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2017년 2월, 흑인 역사의 달을 맞아 대다수 흑인들이 그들의 역사 문화유산을 기념하듯이 이제는 우리 한인들도 우리의 숨겨진 우리의 이야기를 찾아 기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 한인의 이민 역사도 켜켜이 쌓여 오래되어 가는데 우리의 이민 역사와 유산을 만들고 정리하고 지켜나가야 할 임무를 더이상은 미룰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혜정 기자>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 그때 그리고 지금

[2017년2월호, 14페이지]

Tyshia Ingram이 본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 그때 그리고 지금

내추럴 헤어에 대해 처음 인식하게 되었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길을 걸어가고 있었고 반대편에서 크고 킹키한 컬 아프로 스타일을 한 여성들이 스쳐지나갔다. 이제 다시, 본 스트레이트, 릴랙서로 편 헤어, 혹은 브라질리언 익스텐션 대신 자연스러운 상태의 자신의 진짜 헤어를 흔들고 길을 활보하는 흑인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이후, 때때로 그리고 꽤 자주 상황은 바뀌었다. 이제 매순간 내추럴 헤어를 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페이스북에는 자신의 자연모를 깨끗히 자르고 “크리미 크랙”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하는 많은 친구들로 넘쳐난다. 길에서 한 두명 마주치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헤어를 드러내고 있다. 인터넷에서 시작한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는 이내 많은 이벤트와 포럼,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내추럴 헤어에 대해 가르치고 나누고 토론하는 장이 펼쳐지고 있다.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가 막 시작된 2010년 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의 시작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의 공식적인 시작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내추럴 헤어가 없었던 적도 없다. 그렇지만 좀 더 특별하게 아프로 스타일이 정치적 이미지의 아이콘이 된 것은 70년대이다. 그렇지만 곧 릴랙서와 케미컬로 텍스처를 입힌 머리가 몇 십년간 흑인여성들을 대변하게 된다. 그리고 꽤 최근에 이르러서야 전세계의 모든 흑인여성들이 참여해 그녀들 자신의 내추럴 헤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9년과 2011년 사이를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가 탄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리서치 그룹 민텔(Mintel)이 릴랙서의 판매가 12.4% 급감하고 36%의 흑인여성들이 릴랙서의 사용을 그만두었다고 발표한 것이 이맘때이다. 이 시기가 바로 사람들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디지털과 소셜 미디어로 소통하기 시작한 바로 그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흑인 여성들은 자신이 직접 제작한 사이버 공간에 자신의 이미지를 게시할 수 있게 되었고, 내추럴 헤어 블로거들은 내추럴 헤어를 추구하는 많은 여성들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블로그가 게시되고 비디오가 제작되고, 컨퍼런스가 열리고 많은 여성들이 서로 교류하며 하나의 공론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우리의 내추럴 헤어를 사랑하며, 과거의 기준에 더는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내추럴 무브먼트의 성장

처음 몇 년 동안,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는 상당히 배타적이었다. 유명한 내추럴 헤어 블로거가 있다. 그 블로거가 어떤 마을에서 작은 지역 모임을 주최한다고 하자. 그러나 이 모임은 아프리칸 어메리칸 커뮤너티에만 한정되어 이루어졌었다. 2011년 후반 메이저 헤어 케어 브랜드들이 세일즈나 검색 키워드 #naturalhair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러한 현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특히 유색인종이나 여성들이 소유하거나 경영한 초기 브랜드의 경우 많은 흑인 여성들의 니즈에 부합하는 제품과 시스템을 만들려 노력했다. 세어 모이스처(Shea moisture)와 같은 기업은 다양한 내추럴 헤어 타입을 위한 많은 제품을 만들어 냈으며, 카렌즈 바디 뷰티풀(Karen’s Body beautiful)과 같은 내추럴 헤어에 포커스를 한 브랜드가 타겟과 같은 메이저 소매점에 정식 데뷰하게 된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제품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이때, 주류 브랜드들이 내추럴 헤어를 위한 특별한 제품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 내추럴 무브먼트에 있어 가장 구심적인 순간은 상징적인 헤어 브랜드인 팬틴이 그들의 제품 라인을 릴랙스 헤어와 내추럴 헤어 두 개로 나누었을 때이다. 릴랙스 한 헤어를 위한 릴랙스한 제품과 내추럴 헤어를 위한 진짜 내추럴 제품으로 말이다.

2013년까지 이 운동은 점차 강력한 추진력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운동이 단순히 한 순간의 움직임이나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색 여성들은 계속 무언가 선언하고 있고 더 이야기 하고 싶어했다. 비록 헤어 브랜드나 회사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에 따라 마케팅과 제품을 수정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여타의 다른 세계는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 많은 여성들이 생활 속에서 그들의 내추럴 헤어를 찰랑거리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이 되었지만, 주류 미디어 속에서는 아직 일반적이지 않았다. 매거진 속에서 내추럴 헤어의 여성은 플랫 아이런이나 스트레이트 헤어를 한 여성보다 찾아보기 힘들었다. 크든 작든 스크린 속에서도 그 존재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운동이 여전히 거세지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성장은 논쟁과 함께

어떤 운동이던 간에, 그 운동이 성장한다는 것은 눈에 잘 띄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러한 가시성은 때로는 좋은 점을 또는 나쁜 점을 불러오게 마련이다. 이 내추럴 헤어 운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이 새로운 것인냥 생각하는 반대 그룹도 있었다. 릴랙스한 머리카락의 마지막 끝 부분을 잘라내면서, 나는 너무나 많은 질문을 받았다. “ 어떻게 이런 머리카락을 갖게 되었어요? 아프지 않아요? 얼마나 걸렸나요?” 그리고 흔한 질문, “만져도 괜찮아요?”. 내추럴 헤어 스타일을 한 흑인여성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이 2013년 늦은 봄에 열렸던 논쟁적인 전시회 “You can touch my hair”에 불꽃을 붙인 셈이다. 내추럴 헤어 사이트 Un’Ruly의 설립자가 기획한 이 전시회는 다른 사람들이 흑인 여성의 헤어를 만져볼 수 있도록 하는 기획이었다. 충분히 예상되는 대로 이 전시회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이 전시회의 목표는 내추럴 헤어에 대해 다른 문화권의 여성들을 교육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헤어에 대해 계속 물어보는 것이 왜 모욕적인지에 대한 에티켓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었다. 이 전시회가 유효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아직도 내리기 쉽지 않지만, 적어도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가 정점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 운동은 점점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더 강해졌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추럴 헤어를 한 유명인들이 자신의 내추럴 코일 헤어 스타일을 멋지게 하고 레드카펫에 등장했던 2014년은 내추럴 헤어 운동이 진정으로 주류가 되었던 때이다. 많은 내추럴 헤어의 여성들은 Lupita Nyong이 금빛 머리띠를 한 짧은 내추럴 헤어 컷스타일을 흔들며 레드카펫을 한바퀴 돌았을 때 진정으로 환호했다. 또한 Viola Davis가 프라임 시간대 텔레비전에서 내추럴 헤어로 쇼케이스를 펼쳤을 때 축배를 들었다. 그리고 Solange Knowles의 아름다운 아프로 스타일 웨딩 포토에 감탄했다. 2015년 말, Dove는 최초로 컬리 헤어를 한 이모티콘을 제작했다. 이제 내추럴 헤어 이모티콘를 문자로 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Victoria’s Secret의 런웨이에 내추럴 헤어로 등장한 최초의 모델, Maria Borges도 기억한다. 그리고 현재까지 내추럴 무브먼트에서 가장 인상 깊은 점은 정말 많은 젊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자신들의 내추럴 헤어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은 흑인 여성들과 아이들이 머리를 릴랙스하거나 스트레이트 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그러나 내추럴 헤어 무브먼트는 많은 흑인 여성들이 자신의 헤어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꿨고,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더 사랑하도록 하였다.이에 발맞춰 Oyin Handmade, Eden Bodyworks, Taliah Waajid와 같은 회사들은 내추럴 헤어의 어린
이들만을 위한 제품 라인을 만들었다. 심지어 Dove가 기획한 획기적인 Love Your Curls 캠페인도 있었다. 이 캠페인을 통해 어린 소녀들이 자신의 곱슬 머리를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베스트셀러 저자가 쓴 책도 함께 발간되었다.

앞으로의 전망은

점점 더 이 내추럴 운동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미 내추럴 헤어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의하는가?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 글을 쓰고, 다른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내추럴 헤어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도 느낀다. 많은 여성들이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또 겁을 내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아직 자신의 내추럴 헤어 때문에 불안하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다. 아직 이 운동이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부분이다. 앞으로 5년동안 이 운동이 어떻게 발전되고 진화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 우리는 아무데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영혼의 울림 _ 흑인 음악

세계를 울리다

요즘 한국 방송을 보면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한국 사람이 이렇게 많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가수야 그렇다치고 일반인들도 가수 못지않은 쟁쟁한 실력을 뽐내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스트레스 중에 노래 못하는 스트레스, 음치 스트레스는 한국에만 있다는 어느 기자의 칼럼이 새삼 놀랍지 않다. K-pop의 인기는 또 어떠한가. 세계 문화 역사를 새로 쓰는 것처럼 동방의 작은 국가의 어린 가수들이 세계 속에서 위상을 떨치고 있다. 역시 한국인은 노래를 잘한다는 명제가 다시금 증명되는 것 같다.

그런데 방송에서 불려지는 노래 면면을 살펴보니, 우리네 어른 세대가 불렀던 그 가락과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다. R&B, 힙합, 펑키, 소울, 온통 신기한 이름을 가진 노래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낯선 이름의  멜로디에 우리의 정서를 실어 우리의 목소리로 불러도 어색하거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음악들은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그네들의 정취를 담아 오늘도 울려퍼지고 있다. 그렇다. 이제는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넘어 세계의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은 이 음악들이 바로 흑인 음악이다. 백인 음악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클래식, 각 나라의 민요와 같은 전통 음악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표 음악으로 자리 잡은 흑인 음악. 오랫동안 약자로서 누구보다 힘겨운 억압의 역사를 겪었던 이들의 음악이 어떻게 세계 대중음악의 대표 주자가 되었을까.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흑인들. 그들이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으로 머나먼 이곳까지 끌려오게 되면서 우리 모두가 익히 아는 그 비극이 시작된다. 동등한 사람이 아닌 노예. 그들은 억압적인 인종 차별을 당했고,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하루 16시간이 넘는 노동을 감내해야만 했다. 웃음도 대화도 허락되지 않았던 그들이 힘든 노동을 버텨낼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 가슴의 응어리를 드러낼 수 있었던 허락된 단 하나, 그것이 바로 필드홀러, 흑인의 노동요였다. 힘겨운 노동을 견뎌내야 하는 흑인들의 고통과 답답함, 설움을 신께 털어놓는 호소의 멜로디였다.

이러한 가혹한 일상생활에서 구제될 길을 찾아 나선 흑인들, 그들이 개신교와 만나고 찬송가와 조우하면서 필드홀러는 ‘흑인 영가’로 변모하다. 한편, 1920년대 이르러 미국의 산업이 제조업으로 바뀌면서 흑인들의 삶도 급격한 변화의 흐름을 타게 되는데, 많은 흑인이 농장이 있는 남부를 떠나 북부 도시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흑인의 음악적 감수성에 도시의 유쾌한 소음과 활기가 더해진 블루스가 탄생한다.

20세기에 들어 흑인영가와 블루스는 각각 새로운 음악 장르를 낳는데, 바로 가스펠과 재즈이다. 1930년 경 발생한 가스펠은 흑인 영가가 블루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변모한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신앙 음악이라 할 수 있다. 예수를 찬양하는 가사의 내용은 종교 음악과 같지만, 노래하는 방식은 정열적이며 예수에 대한 러브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재즈는 블루스의 영향 아래 1900년 경 파생된 음악으로 백인의 클래식 음악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발전하였다. 이 재즈를 지점으로 흑인음악은 진정으로 미국 음악의 중심으로 화려하게 부상하게 이른다. 재즈는 뚜렷한 문화적 유산이 없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에서 태어나 세계로 뻗어나간 미국 고유의 음악 장르로 인식된다. 미국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타자로 여겨졌던 흑인들, 그래서 그런지 그들에 의해 만들어진 음악이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고 하니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 즈음, 시카고를 중심으로 블루스보다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리듬을 가미한 새로운 음악이 부상한다. 이름하여, 리듬 앤 블루스, 요즘은 줄여서 알앤비라고 통한다. 한국의 대중 음악계에서도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우리 가수들도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음악적 뿌리를 알앤비에서 찾는다. 이후 리듬 앤 블루스는 백인 음악인 컨츄리 뮤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20세기 대중 음악의 신기원을 여는 장르이자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로 대변되는 록큰롤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록큰롤은 이후 하드 락, 메탈 등 수많은 하위 장르를 탄생시키고 전 세계인의 헤드벵잉을 이끌어내었으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음악의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 대 말, 우리는 또다시 흑인들에 의해 생겨난 전혀 새로운 음악의 충격에 빠지게 된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젊은 흑인들의 중얼거림이 세계를 뒤흔드는 힙합음악으로 재탄생되어 순식간에 세계 대중음악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다. 할렘 거리에서 흘러나온 이 길거리 음악은 엄청난 규모의 음반산업을 일으켰으며 신세대의 창조적 자기표현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엄청난 열정으로 자신들의 일상을 빠른 비트의 리듬에 담아내는 가사와 읊조리는 방식의 음악은 억압과 차별 속에 주류에 편입할 수 없었던 변두리 젊은 흑인들의 외침이고 선언이었다.

흑인들은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 ‘자유’를 외치고 싶었다. 음악이 행해지는 모든 장소 그곳이 공연장이든 길거리이든, 그곳을 자유롭게 뛰놀며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아무런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털어놓는 것, 이를 통해 어쩌면 순간일지라도 자유를 만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가지지 못한 자유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세계인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열정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음악은 힘이 세다. 태어난지 얼마 안된 어린아이도 슬픈 멜로디의 음악에 공감할 수 있다.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이 없더라도 아름다운 노래 가락에 실어 내뱉는 내 마음의 소리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감성의 힘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인 음악.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멀고 먼 길을 떠난 흑인들이 세상과 교류했던 그들의 음악에 세계인이 응답하고 공감하고 있다. 한의 정서와 저항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흑인 음악은 아주 긴 세월동안 세계인의 마음을 울리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소리가 되었다. 우리가 향유하는 그네들의 음악의 중심에는 고된 삶과 연결된 감수성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들은 언제나 우리의 감성과 조우하여 우리 삶 속으로 반추될 것이다.

위대한 나라는 역사를 감추지 않는다

워싱턴 흑인역사문화 박물관 개관

screen-shot-2016-11-14-at-9-51-36-am2016년 9월 24일, 워싱턴 DC의 한복판에 위치한  ‘국립 흑인역사문화박물관’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이 문을 열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건너와 수많은 희생과 투쟁의 시간을 거쳐 미국 ‘시민’이 되기까지 흑인들의 영욕의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 미국의 심장부에 당당히 자리 잡은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2012년 2월 그 첫 삽을 뜬 지 4년 7개월 만에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드디어 정식 개관한 것이다. 이날 개관식에는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아들 부시 전 대통령 부부가 참석해 역사적인 흑인 역사 문화 박물관의 개관을 축하했다. 이날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흑인의 역사는 예전보다 더 많이 이야기 해야 하는 ‘영광의 역사’이며, 이곳의 이야기는 흑인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에 대한 것이다. 이 박물관은 ‘우리가 미국이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이 처음 구상된 것이 101년 전이라고 하니, 얼마나 긴 시간을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계획과 완공의 여정이 사뭇 미국 역사에서 흑인이 걸어온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연방의회는 이 박물관을 건립하는 데 필요한 예산을 책정하는데 늘 인색했고 항상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다 1963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함께 학생 대표로 행진했던 흑인 민권운동가 출신 정치인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1988년 관련 법안을 내놓으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계획 당시에 이 박물관은 지금과 같이 독립된 건물이 아니라 미국사 박물관의 한 코너에 덧붙이는 형식이었는데, 루이스 의원의 계속된 노력이 2003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법안 서명으로 결실을 맺게 되고 마침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퇴임 4개월 전 문을 여는 이 박물관은 이제 워싱턴의 새로운 랜드 마크로 자리 잡아 고난의 끝에서 영광에 도달한 당당한 흑인의 역사를 대변할 것이다.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은 국립자연사박물관, 우주항공박물관 등 많은 박물관이 밀집해 있는 워싱턴의 중심 내셔널 몰 안에 위치한다. 박물관의 외관은 아프리카 원주민이 쓰는 왕관을 연상시키는 듯한 3단 띠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구릿빛의 띠 형상은 모두 3,600개의 알루미늄 패널로 만들어져 있다. 박물관 측은 이 형상이 기도하는 사람의 손을 본뜬 것이라고 설명하며, 각 띠는 신념과 희망, 치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대부분 개인 소장자들이 기부한 물품들로 이루어진 전시물들을 살펴보면, 노예무역 선의 온갖 잔인한 도구와 장치들에서부터 흑인들이 선도해온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재즈와 블루스, 힙합과 관련된 소중한 장면들까지 다양하다. 최근 미국 재무부가 20달러 지폐의 인물로 선정한 흑인 역사의 상징적인 인물인 해리엇 터브먼의 유품과 냇 터너의 ‘피 묻은 성경’을 마주하면 비록 우리가 그들의 아픔과 고난에 완전히 공감할 수 없긴 하지만 적어도 이해하고 슬퍼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그리고 2008년 당시 누군가 쓴 “로자가 앉았기 때문에 마틴이 걸을 수 있었고, 마틴이 걸었기 때문에 오바마가 뛸 수 있었다. 오바마는 뛰었고, 승리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이제 날 수 있다”라는 오바마 선거 캠페인 문구에 드디어 감동하게 될 터이다.screen-shot-2016-11-14-at-9-48-55-am

인간 사회의 그 무엇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부당하고 가혹했던 노예제도의 역사를 기억하고 반성하며 이제 새로운 시대에 도달한 그들의 이야기를 흑인역사문화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박물관의 개관이 갖는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백 갈등이 미국만큼 첨예한 나라도 없을 테지만, 또 대중음악처럼 흑인의 문화가 미국만큼 발전된 사회도 찾기 힘들다. 이 시간까지도 백인 경찰의 총에 목숨을 잃는 다수의 흑인과 그들의 투쟁이 한 쪽에서 일어나고 있기에 아직도 완전한 성취를 이룩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그들의 역사가 아픈 역사인 동시에 승리의 역사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을 통해서 반추해 볼 수 있다. 인종차별을 넘어 흑인이 백인과 동등한 권리를 갖도록 끊임없이 투쟁하고 하나하나 쟁취해온 그 노력의 물리적 실체를 미국 수도의 중심부에서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는 앞으로도 더 많이 이야기될 것이고, 그들이 이야기는 미국 전체의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우리 업계의 소비자 계층이 대부분 흑인이기에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들의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과 관련된 핵심 의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도 안 보이는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들과 긍정적 관계를 확립하고 서로의 발전을 위한 노력들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역적이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접근 태도로는 흑인 전체 커뮤니티에 큰 영향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번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개관을 통해서 생각해 때, 가시적으로 흑인 커뮤니티와 연대하려는 한인 뷰티인의 제스처를 보여주는 하나의 방식으로 흑인 뷰티 헤리티지 펀드를 조성해보는 것은 어떨까.

선입견이 사실보다 무섭

인종에 따라, 출신국가에 따라 문화는 다르지만 인간적 사고는 동일하다

스패니쉬 밀집 지역을 지나가던 중 갑자기 요란한 불빛이 번쩍였다. 깜짝 놀라 앞뒤를 살펴보니 경찰차 한 대가 필자의 차를 향해 세우라는 불빛이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둘러 운전면허증을 꺼내들고 경찰이 오기를 기다렸다. 무의적으로 ‘자칫 잘못하면 경찰의 총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몰려왔다. 순간, 시민을 보호하는 경찰이 강도보다 더 무섭게 느껴지는 이상 현상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뉴스의 영향이 그만큼 큰 선입견을 갖게 한다. 특히 유사한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는 감성이 이성보다 강하게 작동하면서 사실 이상의 상상과 선입견을 갖게 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경험하게 된다. 반복적인 상황이 선입견을 갖게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선입견은 사실보다 더 강한 믿음으로 변질는 경우도 많다. 문화적 이질감은 이렇게 인종이나 출신 국가뿐 아니라 갖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지고 허물기 힘든 벽을 형성하는 큰 사회 문제다.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는 한인 이민자들이 상대하는 고객은 주로 흑인 인구다. 성장 배경이 다르고 언어도 다른 상황에서 동족들 사이에나 존재하는 선입견까지 극복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 이 모든 것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예기치 못한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위험요소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장사라는 목적에 보다 충실하기 위해 문화적, 선입견적 차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멈춰 서는 안될 것 같다.

잘못된 선입견

많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 사실과 다른 선입견을 갖고 있다. 타 민족에 비해 우범적이고 거짓말과 도둑질이 빈번하다는 잘못된 선입견. 백인 지역과 흑인 지역의 백화점에서 벌어지는 각각의 절도 사건 비율만 따져 보아도 흑백 간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강력 범죄율 측면에서 보아도 흑인의 범죄율이 결코 높지 않다고 알려졌다.

경제적 여건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율은 당연히 흑인 사회가 더 높을 수 있다. 그 같은 사실 역시 한발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백인이나 한국인이라 해도 유사한 경제 상황에 처하면 거의 비슷하거나 더 많이 벌일 수 있는 범죄율이라서 특별하다 할 수 없는 문제다.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다 보면 어린 자녀가 훔친 물건을 들고 가게를 찾아와 잘못을 빌도록 하는 흑인 부모를 간혹 만나 볼 수 있다. 흑인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 때문에 피해를 보는 부모들의 콤플렉스가 오히려 작은 잘못까지도 엄하게  다스리는 편이다.

잘못된 선입견으로 가게를 방문하는 흑인 손님을 도독으로 의심하고 집중적으로 관찰하는 경영인들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빈번한 피해 경험으로 경계를 강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억울하게 의심을 받는 선한 흑인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의심받는 만큼 도독질을 해서라도 가게 주인을 응징하고 싶어지는 마음도 들 것이다.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어느 수위까지 도둑을 지켜야 하고, 어느 수준에서 믿음을 주어야 할지 분명한 선을 긋기 어렵다 보니 선한 피해자는 늘어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반면, 한인 상인에 대한 선입견도 존재한다. 인정도 없이 돈 밖에 모르는 무례한 사람들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 이렇게 선입견은 문화적 이질감을 키우는 무서운 요소다.    

그래도 흑인 범죄율은 높다

어쩌면 억울한 약자의 서러운 현실일 수도 있는 문제다. 불과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18세 이상 흑인 남성의 다수가 전과 기록을 갖고 있었다. 아주 경미한 경범죄와 마약 소지와 같은 전과 기록이 다수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일부 인권 운동가들은 다수인 백인 사회가 흑인 노동자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근로 연령의 흑인 남성들에게 전과 기록을 갖도록 하여 합법적으로 고용의 기회를 축소 시켰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수 천만 명이나 되던 미 대륙의 원주민(인디언)들의 자취를 이제는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많은 수의 인디언이 총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술이 그들을 몰살하는 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알코올 분해력이 약하고 중독률이 높다는 체질적 조건을 이용해 술로 자멸토록 했다는 주장이다.   

일부 흑인 인권 운동가들은 이 같은 주장을 근거로 흑인 사회에 넘쳐 나던 마약의 배경을 설명했다. 흑인 사회에 마약이 범람하도록 방치하여 흑인 남성의 다수를 전과자로 낙인찍고, 서로 죽고 죽이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려 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런 주장의 사실 여부를 떠나 미 전국의 교도소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체 인구의 14.5%에 불과한 흑인 인구 비율과는 다르게 흑인 죄수들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분명한 것은 흑인 전과자들의 범죄 내용을 직시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살인, 강도, 강간 등 강력 범죄 비율과 경범죄나 마약 소지 혹은 복용 등의 범죄 비율의 진실을 들여다보면 높은 흑인 범죄율의 모순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오랜 세월 흑인 지역에서 장사를 해온 한인 실업인 다수는 “흑인들이라고 범죄를 더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생계형 경범죄 행위가 자주 벌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인간적인 차원에서 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다.”고 말하고 있다.

공권에 맞선 흑인 사회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경찰관이 무섭게 느껴지는 비정상적 사회 분위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운전을 하다가 설령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인격까지 무시당하면 누구라도 화가 치미는 법이다. 죽음을 전하는 의사의 냉정해 보이는 모습처럼 공무를 집행하는 경찰관은 따듯한 감성보다는 객관적 이성을 지켜야 한다. 그런 이성적 언행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시민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진 사람에게는 몇 십 불짜리 티켓은 화를 치밀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몇 십 불의 여유도 없는 시민들에게는 감성을 폭발하게 한다. 특히, 그런 일이 반복적으로 벌어질 경우 억울한 마음도 생기게 되는 것은 매우 인간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작게나마 분노를 노출하면 공권력 도전으로 간주되어 극단적인 사건으로까지 번지는 것이다.

핸드폰과 크레딧 카드, 가는 곳마다 설치된 수 백, 수 천만 개의 카메라가 늘 지켜보는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감성이 풍부한 흑인 시민들은 인간미와 상식적 포용력을 호소하고 있다.

엄격한 스토어 규정보다 작은 배려가 어느 때보다 값지고 귀하게 느껴지는 사회적 분위기다.  잘잘못에 대한 확고한 논리보다는 억지를 유머스럽게 받아주는 아량이 어느 때 보다 고맙게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의심의 눈초리에 반 비례한 신뢰의 따듯함이 간절해질 법한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흑인 고객들의 공통된 갈증일 것이다. 문화적 이질감을 풍부한 감성으로 극복하는 여유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코스모비즈>

 

전 세계를 압도하는 흑인들의 활약

리우 올림픽 속 비하인드스토리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여자 체조 경기에서 5명의 미국 선수들이 한꺼번에 금메달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올림픽 체조 경기장의 코트를 휘어잡은 5명의 선수 중 2명은 흑인 1명은 히스패닉 2명은 백인이었다. 백인들의 전유물로 취급되어 왔던 수영과 체조에서 흑인들의 활약이 빛났던 리우 올림픽이었다.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흑인들의 담담한 반응이다. 김연아 피겨스케이트 선수 하나로 온 나라가 자랑하며 시끌벅적하던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반면에 흑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 미국에 금메달이 쌓이는 것에 자랑스러워할 뿐이지 ‘흑인’선수가 잘 하고 있는 활약에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성숙한 시민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백인, 동양인 등의 타민족의 시각도 이전과는 달랐다. 못난 것이 우연히 금메달을 땄다며 같잖다는 듯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진심 어린 마음으로 축복하는 모습이었다.

특히 체조와 수영은 백인들이 강세를 보이는 경기 종목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수영과 체조가 화이트 스포츠로 인식되어 오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2016 리우 올림픽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 흑인 선수들이 백인이 강세하다고 여겨졌던 경기종목에서조차 우세하게 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종별로 스포츠를 나누어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체조 경기에서 무려 4관왕에 오른 Simone Biles도 흑인 체조 선수이다. 마치 음악 속 리듬이 현실 세계에 튀어나와 눈앞에 그려지듯 움직이는 그녀의 동작에 관중들은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 했다. 어떤 이들은 체조 경기 장면을 폰에 담아 SNS에 공유하고, 시몬 선수의 매 순간 움직임에 찬사를 보냈다. 4’9”의 작은 키와 흑인으로써 최고의 체조 선수가 된 시몬은, 세계를 한번 더 놀래킨다. 시몬이 자라온 환경이 사람들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생활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사람들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시몬은 모든 이들에게 환경, 출신 등의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나 세계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준다.

사람들은 예상했다. 흑인으로서 세계 최고의 체조 선수가 되기까지, 분명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강한 부모가 그녀를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부잣집에 태어난 딸도, 부모의 강한 보살핌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시몬은 생물학적 아버지는 모르고 약물 중독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그런 그녀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좋은 새엄마를 만난 것도 새아빠를 만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조부모 손에서 자랐다. 위탁가정을 전전하던 시몬 자매가 불쌍했던 그녀의 외할아버지 론은 시몬의 동생이라도 입양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의 재혼자 넬슨의 건의로 동생과 시몬을 함께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재혼할 때 친자식도 데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기 힘든 세상이다. 하물며 재혼하는 남편의 손녀를 입양한다는 것은 우리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몬의 할머니이자 엄마인 넬리와 동네 체조 코치 에이미 부인이 함께 시몬을 최고의 체조 선수로 키워낸다. 그리고 그 어느 소녀보다 밝은 모습으로 성장시켰다. 선의를 가진 개인이나 공동체의 배려가 ‘버려진 아이들’에게 얼마나 결정적인 반려자가 될 수 있으며, 그 아이의 성장과 발전에 기여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리 한인들도 그들의 단점만 부각시켜 꾸짖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정신은 존중하고 그들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라고 본다.

흑인 선수의 활약은 수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백인들의 잘못으로 노예가 된 흑인들은 수영장을 쓸 수 없었다. 같은 물에서 함께 수영할 수 없었던 민족적 차별을 받아온 흑인들이다. 흑인들이 자유롭게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최근 흑인들은 시간과 억압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Simon Manuel 선수는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역사적 상처와 흑인 수영에 관련된 인종차별적 편견을 단번에 박살 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마치 돌고래 한 마리가 바다를 건너가듯 수영장을 휘날리며 가로질러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수영이 백인의 스포츠고, 흑인은 수영을 못한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선입견으로 그들을 단정지어버리는 이들에게 크게 한 방 날리는 모습이었다. 최근에는 동양 선수들도 수영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박태환 선수가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은 한국 수영 역사상 큰 금자탑을 세운 쾌거였다.

몇 가지 남지 않은 선입견까지도 깨어지면서 흑인들은 어쩌면 큰 프라이드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뛰어난 성과를 티내지도 뽐내지도 않았다. 흑인 사회와 세상이 바라보는 흑인 사회 모두가 성숙해졌다는 증거이다. 최근에는 Black Lives Matter 운동도 벌어졌지만 이 운동도 이전 흑인파동과 같이 파괴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분명 이전과는 달리 성숙된 흑인 사회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만큼 좋은 해결책을 찾아낼 것이다. 이제는 합리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긍정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흑인들이다. 우리 한인들도 변화하고 있는 그들을 믿어줄 때가 된 것 같다. <유지원 기자>

인간으로서 주어진 단 하루의 삶

6시간의 예배, 단순한 예배가 아니다

일요일 예배시간 흑인교회는 마치 댄스 클럽을 연상하게 한다. 교인들이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빠른 찬송가 반주에 맞춰 신바람 나게 엉덩이를 흔들고 있다. 어떤 이들은 목사보다 큰 소리로 열광하고 손뼉을 친다. 목사님도 힙합가수 못지않게 열광적이다. 그런 모습이 한인들의 눈에는 색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흑인 소비자들의 눈에는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다. 이것이 문화의 충격이다. 이런 모습을 TV 등을 통해 자주 보아왔던 이민자들에게는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있지만 가슴 속으로까지 이해되거나 같이 행동할 수는 없는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

흑인 노예들의 삶은 너무나 한스러웠다. 노동한 결과물의 양을 확인받고 어제와 비교해 작업량이 부족한 노예는 매질당했다. 동료와 결과물을 비교해 매질당했다. 여자 노예들은 주인에게 강간 당하고, 강간 당한 여자 노예는 화가 난 주인의 부인에게 매질당했다. 매질 당하고 매질 당한 부위에 겹쳐서 매질 당했다. 많은 노예들이 노동과 매질로 죽어나갔다. 그런 흑인 노예들에게 일요일은 단 하루의 휴일이었다. 그들에게 일요일은 안식일과 같은 것이었다. 초기 흑인 교회는 흑인이 노예이던 시절에 세워졌는데, 주인이 허락을 받고 교회에 나가는 노예가 생겼다. 흑인 노예들은 그렇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주인들은 교회에 가는 걸 막았다. 노예들의 도망이나 폭동 모의 등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흑인 노예들이 교회에 나가도록 허락한 주인들은 토요일 밤 다음날 교회에 갈 수 있도록 노예들이 샤워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바느질할 수 있는 노예는 다른 노예들의 구멍 난 옷가지를 꿰매 주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꿈꿀 수 없는 황폐한 노예의 삶에서, 그들은 주어진 극악의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한 준비를 하고 예배당에 갔다. 흑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표현하는 “Sunday Best”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정성을 들여 교회에 갈 몸가짐을 하는 것이다. 요즘 흑인들의 “Sunday Best”는 그 의미가 조금 바뀌긴 하였다. ‘신경 써 입었어’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모임이나 데이트가 있어 평소보다 차려 입으면 “Sunday Best”가 사용된다.

교회에 나가는 노예들에게 교회에 있는 시간은 인간으로써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단 하루였다. 그들에게 교회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것이다. 설교를 듣고, 친분을 쌓고, 교회 활동을 하였다. 지금은 노예 시절 교회 보다 수그러 들기도 했지만 그 당시 예배시간에는 따로 댄스타임이 존재했다. 예배 도중 남녀가 함께 엉덩이를 마구 흔들며 링 샤우트를 추는 것이다. 링 샤우트 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남사스럽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는 아프리카 서부에서 기원된 춤으로 미국 남부에서 추는 전통춤으로 재즈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고, 한탄하고, 표출하며 서로의 처지와 고통을 공유했다.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받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흑인교회는 흑인 사회 사교모임의 척추와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문화가 이어져 온다.

교회에서 워낙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 보니 흑인 교회의 예배시간은 유난히 길다. 요즘에도 예배시간이 4시간을 넘기는 교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6시간씩 예배를 보는 교회도 있다. 그런데 예배시간이 긴 원인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들만의 설교 문화가 남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흑인교회의 목사님들은 Call and Respond 방식의 묻고 답하는 설교를 한다. 이 설교 방식은 청자의 깊은 감정까지도 끌어내기 좋다 하여 요즘에 와서는 백인 목사님들도 많이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 상위 15명의 재벌 목사는 모두 이 Call and Respond 방식의 설교를 사용한다-1위  Kenneth Copeland, 순수익 $760 Million 2위 Pat Robertson, 순수익 $100 Million, 3위 Benny Hinn, 순수익 $42 Million) Call and Respond 방식의 설교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싶은 문장의 끝을 올리면 사람들은 그에 반응해 큰 소리로 “amen”, “preach it, brother” 등의 응답을 한다. Call and Respond 설교는 노예 시절 교회부터 이어져오는 설교 방식이다. 이렇게 청중까지 말할 시간이 필요하다 보니 우리 교회에 비해 흑인 교회의 설교 시간이 두 배가량 더 길어지는 것이다.

일부 흑인들은 오랜 과거 방식을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유지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긴 예배 시간이 싫어 백인 교회로 교회를 바꾸는 흑인도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여전히 흑인 교회를 더욱 정겹게 느끼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그러한 이유에서 다른 교회로 발을 돌렸던 흑인들도 다시 자신들의 흑인교회로 돌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흑인 교회는 흑인 노예 역사의 고난을 함께 한 버팀목이었으며, 가족들과 매주 주말을 보내온 추억이 담긴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초기 노예 시절 교회부터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흑인 사회의 주축이 되는 사교 공간이기도 하다. 초기 흑인 교회로부터 필요에 의해 행해진 여러 가지 행위들이 수 세기 동안 지켜져와 이제는 흑인들만의 교회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유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