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Enter" to skip to content

애니깽의 후예, 쿠바의 문이 열렸다

오바마 대통령의 마지막 업적은 쿠바와의 외교정상화다. 오랜세월 공산국가로 미국을 위협해 온 쿠바의 문이 활짝 열린 것이다. 1100만 인구의 약 10%가 흑인이다. 메스티조가 인구의 27%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원주민과 혼합된 남미와는 달리 흑백혼혈이 주를 이루고 있어 곱슬머리를 갖고 있다. 뷰티서플라이의 신천지가 분명해 보인다.

남미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스페인 침략자들은 원래 거주하고 있던 화살촉 머리 인디언 원주민을 거의 모두 학살하여 지금은 흔적마져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페인계 백인과 노예로 아프리카에서 이주해 온 흑인들로 인구가 구성되어 있다. “모든 것이 쿠바에만 가면 잘못되는데 유일하게 쿠바인들이 잘 한것은 흑백인종의 아름다운 조화다”라는 말이 있을 만큼 흑백 혼혈 여성들의 아름다움이 눈에띄는 나라다.

오랜세월 공산체제로 가난을 면치못하였지만 수많은 쿠바인들이 플로리다 등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운영하여 고국에 보낸 덕에 수도 아바나의 경우 소비력도 만만치 않다. 미국본토에서 불과 100여마일 떨어져 날좋은 날에서 플로리다 Key West 가 눈에 보일 만큼 가까운 지리적 요건도 갖추었다.

한때는 미국인들의 휴향지로 라스베가스를 무색하게 할 만큼 유명한 관광지였다. 먹을 음식이 없어도 주말이면 해변에서 파티를 하는 낙천적인 나라로도 유명하다. 범죄율이 높은 인근의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프에르토리코와는 달리 교육수준이 높고 사회보안체계가 잘 갖추어져있다. 여러가지 면에서 뷰티서플라이로는 최적지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멕시코나 카라비안의 다른 나라를 경유해 쿠바로 갈 수 있었지만 가을부터는 매일 100여편의 비행기가 왕래 할 예정이다.

 

쿠바의 한국인

필자가 쿠바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갖게된것은  90년대초 모 방송사 기자로 쿠바를 취재하면서 부터다. 공산국이라 미 국무부와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고 방문했다. 당시 한국외교부에서는 우리 취재진이 한국인으로는 처 쿠바에 가는 것이라 말해주었다. 그런데 막상 쿠바에 도착해 가방을 풀기도 전에 호탤 로비에서 한국인 한명을 만났다. 반가워 인사를 건내자 “남조선 사람들하고는 말 안하겠수다”라며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아치 시펐다. 이 나라가 공산국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있었다.

Screen Shot 2016-06-15 at 7.25.13 PM

현지 안내를 위해 통역해 줄 사람을 구했는데 일정을 짜는 과정에서 “한국마을 한번 가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깜짝놀랐다. 어떻게 쿠바에 한국인들이 살고있다는 말이지?

한국인들이 처음 쿠바로 간 것은 1920년이다. 멕시코 유카탄의 농장으로 떠난 한국인 노동자들이 내란으로 인해 분산되면서 그중 288명이 쿠바에도 애니깽 농장 근로자들이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갔던 것이 계기다.

이들은 아침해가 뜨기전에 들판에 나가 해가 질때까지 적도의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밧줄 재료로 사용되는 애니깽을 자르고 날랐다. 그렇게 번 돈의 절반 이상을 조국의 독립운동과 건국자금으로 기증했다. 모아진 돈은 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현지를 오가며 거두었고 기금의 일부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건국 권으로 발행해 주었다. 한국 외교부의 집계에 따르면 재외동포들이 이렇게 모은 돈이 약 33만불인 것으로 알려졌다.

선불을 받아 가족들에게 이미 주고 온 이들은 빚을 모두  갑고 난 뒤에도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냈다. 인편으로밖에는 보낼 수 없다보니 편지지 한쪽 모퉁이에 바늘 구멍을 뚤어 얼마를 동봉했는지를 암호로 표시해 놓기도 했다. 지금 현재도 33만불을 모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참으로 자랑스러운 선배 이민자들의 역사다.

3 - New Koreans1902년 121명이 애니게이호를 타고 처음 하와이 사탕수수밭에 도착해 받은 월급은 $16 이었다. 하루 일당으로 고작 64센트.  2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사탕수수밭보다 더 험하다는 애니깽 농장에서 받은 하루 일당은 $2.50. 그 중 절반을 독립자금과 건국자금으로 도네이션 했으니 대단한 일이다.

건국채권을 소유하고 있는만큼 이들은 분명 대한민국의 실질적 주주들이다. 당시 발행한 채권을 모두 회수한다면 복리에 복리를 합쳐 지금 한국의 왠만한 도시 한두개를 팔아도 모자랄 만큼 큰 주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쿠바가 1958년 공산국가로 변하면서 왕래가 두절되고 이들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졌다. 인간의 존재가 세상에서 잊혀지는 일이 그렇게 한순간에 벌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36년의 세월이 지난 1994년, 미국으로 몰려오는 쿠바 보트 난민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SBS 특파원으로 쿠바에 갔던 필자가 우연히 이들의 존재를 발견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쿠바에는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있다. 1세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3세들도 60~70의 고령이다. 4세에서 5세로 가면 갈수록 현지인들과 피를 섞어 걷모습만으로는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애니깽의 후예

2 - News paper필자는 미대륙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를 자칭 “자랑스러운 애니깽의 후예”라 부른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멕시코 유카탄과 쿠바의 험한 애니깽 농장에서 피와 땀을 뿌려 이룬 자랑스러운 한인 디아스포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뷰티서플라이업을 개척한 우리 선배들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낮선 도시의 버스 터미날 락커에 가발을 보관하고 매일 몇개씩 들고나가 가가호호 문을  두드려 장사를 시작했다. 60년대와 70년대 미국으로 유학까지 올 만한 사람이라면 분명 대한민국 최고의 브래인들 이었을 텐데 바로 그런 인물들이 가발무역을 시작하면서 오늘날 미국 뷰티산업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한국에 변변한 회사가 없던 시절, 가발공장은 명문대 출신의 인재들이 뽑혀가는 최고의 기업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엘리트집단이 만들어 놓은 것이 가발산업이고 애니깽의 후예들이다.

어쩌다 우연히 만들어진 산업이 아니고, 가격경쟁하면서 제살을 깍는 바보스러운 산업이어서는 않되는 이유다. 이렇게 자랑스럽고 위대한 애니깽의 후예들이 어쩌다 오늘같은 진실되지 못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쿠바의 문이 열렸다. 분명 새로운 기회다. 경제상황이 개선되면서 많은 뷰티인들이 진출할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건설하는 시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애니깽의 후예들 답게 정직하고 세련된 사업이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코스모비즈는 9월말 쿠바 방문을 계획중이다. 쿠바의 주요도시를 방문하고 쿠바 정부관계자들을 만나 뷰티서플라이 진출과 가능성을 타진해 볼 계획이다. 동행할 경영인들은 전화 (301) 329-8300으로 문의하거나 Editor.CosmoBiz@gmail.com으로 이메일하면 된다.  <장현석 기자>

 

Comments are closed.